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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티비나우 무료 시청 가격 TV 연결 방법 총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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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Jericho 댓글 0건 조회 9회 작성일 25-08-08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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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의 배구 고화질 노트북 오늘 역사를 바꾼 사물들』 Ⅱ -▣환희와평화가져다준‘고무’▣관찰과실험가능케해준유리와과학혁명▣2차세계대전방향바꾼‘구아노’▣음악사를바꾼‘피아노’▣산업혁명·수탈의상징‘철도’▣설탕 ohyh45 ・ 20시간 전URL 복사 이웃◆『김기철의 역사를 바꾼 사물들』을 더 보시려면 아래 URL을 클릭하세요▣반도체 전쟁 이전에 청어 전쟁 있었다,▣대항해시대의 수호신,오렌지, ▣소금가격 폭등으로 한국인의 매운맛 탄생했다?,▣중국을 2000년 무역흑자국 만든 비단, ▣최악의 학살자라는 모기의 나비효과, ▣고래-일본의 개항과 근대화를 이끌었다?▣세상에 환희와 평화를 가져다 준 고무, ▣‘관찰’과‘실험’가능케해준 유리와‘과학혁명’, ▣구아노-2차세계대전 방향 바꿨다, ▣음악사를 바꾼 피아노, ▣산업혁명과 수탈의 상징,철도, ▣추악한 제도가 만든 설탕​​​7.고무 - 동물의 창자로 만든 『콘돔』을 썼다고?…세상에 환희와 평화를 가져다 준 이 물건​공, 둥근 공이 없으면 인생이 얼마나 심심할까. - 축구공, 야구공, 농구공, 테니스공, 럭비공, 골프공.통통 튀는 이런 공들이 없으면 세상은 얼마나 삭막할까.아이들은 친구들이랑 뭐하고 놀고, 어른들은 남는 시간을 뭐하면서 보낼까.아마 즐거움은 사라지고 갈등과 싸움은 늘어날 것이다.​사실 인류가 공을 갖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843년 미국의 찰스 굿이어가 생고무에 황을 첨가해 온도에 상관없이 고무의 성질을 안정시키는 가황처리기법을 발견한 뒤에야 가능한 일이었다.​고무는 인류에 즐거움과 평화를 가져온 소중한 물건이다.어디 그뿐인가. 고무로 인해 바퀴는 비로소 완전해져서 인간이 탈 수 있는 이동수단이 됐다.​굿이어타이어의 창업자 폴 리치필드(Paul W. Litchfield)는 근대산업구조를 생명체에 비유해서 “금속이 뼈대, 석유가 피라면 고무는 생명체의 유연한 근육과 힘줄”이라고 했다.축구공을 돌리고 있는 손흥민​​바운스! 바운스! 세상을 뛰게 만든 재료, 고무​고무는 구대륙에는 없는 물건이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처음 히스파뇰라섬(지금의 아이티)에 도착했을 때 원주민들이 통통 튀는 둥근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을 봤다. 유럽인이 고무를 처음 접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유럽의 공은 보통 가죽으로 만들어서 안에 양털이나 깃털을 채워 넣어 만들었는데 원주민들의 공은 유럽인들의 공과는 차원이 달랐다.​1535년에 출간된 스페인의 아메리카 진출에 대해 쓴 최초의 공식기록서인 ;에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이 갖고 노는 고무 공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당시 스페인어에는 없던 단어 ‘바운싱(bouncing)’을 설명하려고 애를 썼다.​“그 공들은 우리의 공보다 훨씬 높고 길게 점프했다. 단지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살짝 닿기만 해도 시작점보다 훨씬 높이 솟아오르며 점프를 했다. 튀어오르기를 몇 번이나, 자꾸자꾸, 높이를 점점 줄여가면서, 마치 속이 빈 공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가볍게.”​1743년 프랑스 과학자 샤를-마리 드 라 콩다민은 아마존 탐험 여행을 했다. 이때 그는 두가지 중요한 발견을 했다. 한 가지는 말라리아 치료제인 퀴닌의 원료가 되는 신코나 나무이고 다른 한 가지는 현지의 원주민인 오마구아족이 사용하는 고무였다. 오마구아족은 나무에서 나온 액체를 이용해서 바구니 같은 것을 만들어 사용했다.​콩다민은 귀국 후 프랑스과학아카데미에 “한 차례 절개하면 나무에서 우윳빛 액체가 분비되는데 액체는 일단 공기와 만나면 점차 검게 굳어진다”고 고무에 대해 보고했다.​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방수용 코팅 재료로 쓰이는 등 고무의 사용이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고무는 날이 더우면 끈적끈적해지고 냄새가 나며, 추울 때는 돌처럼 딱딱해지고 부서지기 쉬운 치명적 결함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고무가황법을 발견한 찰스 굿이어(Charles Goodyear)​​미국의 파산한 실업가인 찰스 굿이어(Charles Goodyear)가 이 문제 해결에 매달렸다. 1839년 천연고무덩어리와 황을 혼합한 물질로 실험을 하다가 실수로 뜨거운 난로 위에 떨어뜨렸다. 난로 위에 떨어진 고무 덩어리가 내구성이 뛰어나고 탄성이 커질 뿐 아니라 절연성까지 갖춘 물질로 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하지만 굿이어는 특허를 도둑맞았다. 자신이 개발한 고무줄 샘플을 한 청년에 주며 투자자를 알아봐 달라고 했는데 그 고무줄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1842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고무 처리법을 연구하던 토마스 핸콕의 실험실에 배달됐다. 그 고무줄의 가치를 단번에 알아차린 핸콕은 수백 차례 실험을 통해 방법을 알아냈다. 핸콕은 1844년 고무가황법에 대한 특허를 신청했다.​굿이어는 빈털터리로 세상을 떠났다. 굿이어타이어는 그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회사다.1898년 타이어 회사가 굿이어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가져와 쓴 것뿐이다. 그래도 그 덕분에 그의 이름은 역사 속에 남아있다.​​고무, 산업화의 힘줄이자 근육​1844년은 고무가황법 특허 등록이 이루어진 해이기도 하고 미국 워싱턴과 볼티모어 사이에 최초로 전신을 위한 전선이 설치된 해이기도 하다. 이 두가지 일이 같은 해 일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고무가황법으로 고무가 절연재료로서 완벽해졌기 때문에 장거리 전선의 설치가 가능해졌다. 고무는 전기와 전신의 상용화를 가속시킨 것이다.​1845년 마그네틱 전신회사를 설립한 사무엘 모스는 본격적으로 전신선 가설에 나서 1850년에만 미국 전역에 2만km의 전신선을 깔았고, 1861년에는 미국을 황단하는 전신망이 설치됐다. 이로써 처음으로 미국의 국토가 온전하게 하나로 연결될 수 있었다. 고무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1861년부터 1865년까지 미국과 유럽을 잇는 대서양 횡단 해저전신선 설치를 시도했으나 매번 실패했다. 1866년에는 미국과 유럽이 대서양을 횡단하는 전신선으로 연결됐으며 아프리카, 아시아, 호주에도 전신 시스템이 구축됐다.해저 케이블 - 대서양 케이블은 1858년시도했고 1866년에 성공했다​​이처럼 세계를 하나로 연결한 것도 고무의 성능이 개선돼 해저케이블 설치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해저케이블 설치 경쟁은 지금까지 진행 중이다. 전 세계 데이터의 99%가 해저 케이블을 통해 전송되기 때문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전 세계 바다 밑에는 450개 이상 140만㎞에 달하는 해저 케이블이 깔려 있다.19세기 후반은 내연기관, 전기와 통신이 본격화되는 시대였는데 사실 고무가 없었다면 이런 발명품들도 보편화되지 못했다.자동차의 보급이 고무 수요을 폭발시켰다. 사진은 포드자동차의 설립자 핸리 포드의 모습.​​우선 내연기관의 안을 한번 들여다 보자. 모든 내부 연소기관에는 물, 기름, 가솔린, 그리고 배기가스가 파이프와 밸브를 고압 상태로 흐른다. 따라서 파이프와 밸브의 이음새가 완벽하지 않으면 내연기관은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것이 탄성이 있는 고무의 성능 개선이었다.​내연기관의 동력전달 역시 고무의 힘에 크게 의지했다. 옛날 방앗간이나 경운기의 고무밸트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기계장치의 힘줄 역할을 고무가 맡은 것이다.​전기와 통신이 보급되기 위해서는 선로 확장이 기본이다. 전신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내구성과 절연성을 갖춘 물질이 필요했다. 그 재료로 역시 고무만한 것이 없었다.​이뿐 아니다. 전기제품의 경우에는 내부가 여러 회로로 연결돼 있는데 이런 회로도 고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무엇보다 고무 수요를 폭발시킨 것은 자동차의 보급이었다. 19세기 후반, 전기와 통신, 내연기관, 자동차의 발전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데에는 고무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제국주의 세력의 고무전쟁​전기와 통신, 자동차의 보급으로 고무에 대한 수요가 폭증했지만 당시까지 고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단한가지였다. 아마존 유역에 집중적으로 서식하고 있는 고무나무인 히비어 브라질리엔시스(Hevea brasiliensis)에서 채취하는 방법뿐이었다.​고로쇠나무에서 고로쇠 수액을 채취하는 것처럼 고무나무에 상처를 내면 우윳빛 점액질 수액이 나오는데 그것을 그릇에 모아야 했다. 고무나무 한 그루에서 하루에 얻을 수 있는 양은 28그램이고, 1년에 100~140일만 수액이 흘러나온다.고무나무인 히비어 브라질리엔시스(Hevea brasiliensis)에서 라텍스를 채취하는 모습​​이렇게 생산량이 제한되다보니 고무값이 천정부지로 뛰었고 검은 금을 얻기 위해 경쟁적으로 아마존에 몰려 들었다.​초창기 대부분의 고무는 아마존 하구 항구도시 벨렝 근처에서 채취했다. 하지만 고무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점점 아마존 상류로 올라갔다. 브라질 역사학자 로베르토 산토스의 추산에 따르면 19세기 후반 아마존 일대에만 2만5000개의 고무 농장이 있었다. 포드자동차의 경우에는 아마존 중류인 산타렝에 포드랜디아라는 고무공장을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19세기말이 되자 브라질은 연간 1400만 파운드 어치의 고무 2만 1500톤을 수출했고, 10년 후에는 수출량이 두배로 뛰어서 2460만 파운드 어치, 4만 2000톤이 되었다. 이것은 당시 브라질 무역액의 40%에 해당하는 규모였다.​고무 확보 경쟁 속에서 끔찍하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노동자들이 작업을 해야할 곳이 말라리아를 포함해 각종 풍토병이 득시글거리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고무 수송 철도 건설을 위해 미국의 기업가 네빌 B. 크레이그가 1878년 2월 19일 700명의 인부를 데리고 산투안토니우에 도착했는데 1년 뒤인 1879년 1월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120명에 불과할 정도였다.​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마존으로 몰려들었다. 계속해서 고무 가격이 미친 듯이 뛰었기 때문이다. ‘타임스’는 1910년 3월 20일자에 “제조업자의 공정을 거쳐 사용 가능한 원료가 된 고무 1온스(28그램)은 순은과 맞먹는 가격이 매겨졌다”고 보도했다.​브라질 아마존에만 의존하던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역시 제국주의의 선두 영국이 앞장섰다.​1873년 헨리 위컴이라는 젊은 영국인은 산타렝 인근에서 담배와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경영하고 있었다. 농장은 생각보다 잘 굴러가지 않았다. 그때 위컴은 본국의 명망있는 식물학자 조셉 후커 경으로부터 고무 종자를 구해달라는 편지를 받는다.​‘비용을 아끼지 말고 살아 있는 종자로, 상업용 진짜 파라 고무를 생산할 수 있는 나무의 종자들로만 구해주시오.’​위컴은 인디오를 고용해 아마존강 상류로 가서 종자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가 모은 씨앗은 모두 7만개가 넘었다. 제는 통관이었다. 이때 영국 영사 토머스 그린이 나섰다. 그는 세관소장에게 “대영제국 큐왕립식물원으로 송달되도록 특별히 지정된 극도로 섬세한 식물 표본이 실려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고 말해 검역을 피했다. ​이렇게 해서 영국은 고무나무 종자를 얻었다. 말하자면 위컴은 ‘고무 종자의 문익점’인 셈이다. 오늘날까지 위컴은 브라질에서 ‘도둑놈 중에서도 상도둑놈’으로 통한다.​이렇게 확보한 종자로 영국은 동남아시아 식민지에서 고무 플랜테이션을 시작했다. 먼저 1876년 런던의 큐왕립식물원에서 고무나무 묘목을 들여다 싱가포르에 이식하는 시험 재배를 시작했고 1890년대초부터 말레이 반도에서 고무 재배를 시작했다. ​당시 싱가포르식물원에 주임으로 부임했던 리들리(H. N. Riddley)는 고무 재배를 독려해 ‘고무광 리들리’로 불리기도 했다. 영국 식민 당국은 법과 제도를 총동원하여 유럽 자본가들의 고무 플랜테이션 투자를 지원했다. ​우선 말레이국연방에서 토지를 대규모로 100년간 장기 임차할 수있도록 토지임대차령을 제정했다. 이를 통해 유럽인 플랜테이션 투자자들이 쉽게 고무 농장 부지를 확보할 수 있도록했다.​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가 말레이국연방 페락주의 경우에는 중국인과 말레이인이 소유한 나대지를 유럽인 투자자가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고무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식민 당국이 직접 통제했다. 특히 1907년 영국 식민 당국은 인도인이민위원회와 타밀인 이민기금을 각각 개설해 인도인 노동자들의 유입을 유도했다. 1940년까지 말레이반도에 유입된 고무 플랜테이션 노동자의 74%는 인도인이었다.​이와 같은 유럽 식민당국의 적극적인 투자와 지원으로 고무의 최대 생산지가 아마존에서 동남아시아로 바뀌었다. 1970년 설립된 천연고무생산국협회(Association of Natural Rubber Producing Countries)에는 인도, 방글라데시,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중국 등 12개 아시아 국가들이 회원국으로 가입돼있다. 이중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가 세계 천연고무 생산의 80%를 차지한다.​​고무로 공이 만들어지고 세상이 즐거워졌다​멕시코를 정복한 에르난 코르테스는 1528년 스페인 궁정으로 전리품을 가져와 자신의 공적을 자랑했다. 그 중에는 끌려온 아즈텍인들도 있었다 이 아스텍인들은 두팀으로 나뉘어 작은 공을 사용한 전통게임 울라마(Ulama)를 시연해 보였다. 고무공을 활용한 스포츠가 유럽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순간이었다.[왼쪽] 아즈텍인들의 울라마(Ulama) 경기에 사용되던 고무공인 ‘펠로타(Pelota)’ 돌조각품[오른쪽]1855년 찰스 굿이어가 만든 최초의 축구공[왼쪽] 1930년 우루과이 제1회 월드컵 결승전 당시 쓰인 공.[오른쪽] 2002년 한일 월드컵 공인구 '피버노바'​​세계 어느 지역이나 고대부터 축구와 비슷한 운동경기가 존재했다. 하지만 현대축구의 시작은 1863년 영국에 축구협회(FA·Football Association)가 창립된 때로 꼽는다.​왜 이 때 축구가 공식 스포츠 경기가 될 수 있었을까? 고무가황법의 정착으로 공기를 주입한 공이 세상에 선보였기 때문이다.​1872년 영국 축구협회는 축구공의 기준을 정하기도 했는데 공의 평균 둘레는 약 175~180mm, 무게는 369~425g이어야 했다. 이후 몇차례 변화를 거쳐 지금의 표준 축구공이 자리를 잡았다.​축구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금 즐기고 있는 대부분의 구기 종목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시작됐다.배구의 경우 1895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홀리오크시에 있는 YMCA 체육지도자 윌리엄. G. 모건이 처음 고안했고 농구도 1891년 미국의 메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의 YMCA에서 겨울철에 즐길 수 있는 실내 스포츠로 창안됐다.​12세기 프랑스에서 시작된 ‘라뽐므(La Paume)’에서 유래했다는 테니스도 지금과 같은 모습의 스포츠가 된 것은 1873년 인도 주재군 소령이었던 윙필드가 경기 체계를 세운 뒤에 가능했다. 역시 고무로 테니스 공을 만들 수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야구와 골프처럼 딱딱한 공을 사용하는 스포츠도 마찬가지다.18세기 이전에 영국에서 배트와 볼을 사용하는 경기가 있었다지만 오늘날과 비슷한 경기로 발전한 것은 카트라이트(Cartwright,A.)가 1845년 뉴욕에서 세계 최초의 야구팀인 니커보커 야구협회를 조직한 뒤였다.골프도 14세기 스코틀랜드의 양치기들이 시작했지만 당시에는 나무공이나 깃털로 만든 공을 사용했다. 나무공은 아무리 세게 쳐도 비거리가 70m 이상 날아가지 못해 지금의 골프보다는 진짜 자치기와 더 가까웠다. ​역시 골프가 지금과 같은 스포츠가 된 것은 19세기 중반 고무공을 사용한 뒤부터였다. 1860년 제1회 영국 오픈 선수권 대회, 디오픈(The Open)이 시작됐다.​골프공 표면에 구멍(딤플)을 만들면 공기 저항이 줄어들어 비거리가 더 늘어난다는 점이 발견돼 1897년 이에 대한 특허 등록이 이루어졌다.​고무가 발견되고 가황법으로 성능이 개선되지 않았다면 공을 이용하는 많은 현대스포츠는 탄생할 수 없었다.고무는 우리에게 즐거움과 환희를 가져다준 소중한 물건이다.​​고무가 가져다 준 안전하고 즐거운 성생활​고무가 인류에게 가져온 또 하나의 선물은 바로 콘돔이다. 콘돔은 원하지 않는 임신을 막고, 성병의 전염을 막는 등 인류의 성생활에 크게 기여한 물건이다.​사실 콘돔은 기원전부터 사용하던 대표적인 피임기구다. 하지만 고무가 나오기 전에 사람들이 쓰던 콘돔은 직물로 만들거나, 아니면 동물의 창자나 생선의 방광으로 만들었다. 당연히 피임 효과가 떨어질 뿐 아니라 사용하기도 꺼림직했다.이런 문제를 해결해준 것이 고무가황법이었다. 고무로 만든 콘돔은 위생적인데다 효과적으로 성병과 피임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이었지만, 문란한 성생활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로 인해 콘돔을 판매하거나 광고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국가가 많았다.​콘돔의 사용을 확산시킨 것은 1차 세계대전이었다. 전쟁 중에 참전 군인들 사이에 매독이 유행하면서 이를 막는 것이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해 중요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모는 참전국들 주저없이 병사들에게 콘돔을 의무적으로 보급했다.​일본은 1950년대부터 세계 콘돔 시장에 존재감을 드러냈다. 오카모토주식회사가 인구억제정책의 보조 수단으로 콘돔을 생산하고 판매해, 일본은 1960년대말 세계 콘돔 생산량의 35.5%를 차지했다.​1980년대부터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콘돔은 영국의 듀렉스로 지금은 영국과 네덜란드계 다국적 기업으로 통합되었다. 2000년 이후 세계 시장점유율 1위 콘돔 회사는 한국의 유니더스로 현재는 사명이 블루베리NFT로 바뀌었다.​콘돔은 고무 기술의 발전과 성생활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변모해왔다. 1929년 런던러버컴퍼니가 화학물질을 첨가하지 않은 라텍스를 사용하는 안전한 콘돔을 내놨다.​지금은 바나나, 딸기, 초코, 재스민향 등 취향에 따라 향을 선택할 수 있는 콘돔도 있고 어두운 곳에 가면 빛이 나는 야광콘돔,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눈금자가 그려진 콘돔도 있다.​성감이 배구 고화질 노트북 오늘 떨어지는 단점 때문에 콘돔을 기피하는 사람들을 위한 제품들도 있다. 일반적인 콘돔의 두께는 0.05mm~0.08mm이지만 0.03mm인 초박형 콘돔, 이보다 얇은 0.02mm 이하인 극초박형도 있다. 또 겉표면을 다양한 모양으로 만든 콘돔도 있다.​콘돔 사용이 보편화됐지만 남아메리카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여전히 콘돔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가톨릭에서는 인공피임 방법인 콘돔 사용을 여전히 금지하고 있다.​​고무로 혁신을 이룬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업사​비록 굿이어는 창업자의 이름은 아니지만 고무로 혁신을 이룬 기업들은 대부분 창업자의 이름을 기업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고무에 공기를 불어넣은 타이어를 최초로 개발한 인물은 존 보이드 던롭(John Boyd Dunlop)던롭의 본래 직업은 수의사였다. 하지만 아들이 딱딱한 바퀴의 자전거를 타다가 튕겨나가면서 부상을 당하자 푹신한 바퀴를 만들어주려고 발명한 것이 최초의 공기압을 갖는 타이어가 됐다. 1888년 등장한 자전거용 공기압 타이어는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게 됐고, 던롭은 타이어 회사까지 설립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처음으로 공기압 타이어를 상용화한 사람은 영국의 의사 존 보이드 던롭(John Boyd Dunlop)이다. 세발자전거를 타는 아들이 엉덩이가 아파하는 것을 보고 고무를 이용한 공기압 타이어를 개발했다. 공기압 타이어로 자전거의 승차감이 획기적으로 좋아지면서 자전거 열풍이 불었다.던롭이 개발한 자전거 타이어를 자동차에 이식한 프랑스의 ‘앙드레 미쉐린(Andre Michelin)’과 ‘에도알드 미쉐린(Edouard Michelin)’ 형제​던롭의 타이어는 본드를 사용해 휠에 접착시키는 방식이었다. 이를 불편하게 여긴 미쉐린 형제는 손쉬운 탈부착이 가능한 자전거용 타이어를 1891년 개발해 내놨다.이후 1895년에는 자동차용 타이어를 개발했으며, 푸조의 레끌레흐(L’Eclair) 차량에 장착해 경주까지 참가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파리에서 보르도까지 560km를 달리는 동안 타이어가 22번이나 찢어졌던 것이다. 미쉐린은 공기압이 없어도 달릴 수 있는 타이어를 원했고 1934년 최초의 런플랫 타이어를 발명해 내놨다.1946년 미쉐린은 오늘날 사용하는 구조에 가까운 래디얼 타이어(Radial Tire)를 개발한다. 내구성은 물론 주행안정성과 연비까지 향상시킨 것이다.​​프랑스에서 고무로 된 방수재료 회사를 운영하던 형제의 가게에 한 손님이 던롭 타이어 펑크를 때워달라고 찾아온다. 자전거 타이어를 유심히 살피던 형제는 공기주입 타이어를 착탈식으로 만들면 효과적이겠다는 아이디어로 회사를 차린다. 그 형제의 이름은 앙드레 미슐랭과 에두아르 미슐랭이다. ​1891년 자전거 경주대회에서 미슐랭의 교체형 타이어를 사용한 선수가 경주 중에 타이어가 펑크가 났지만 즉시 교체할 수 있었던 덕에 우승했다. 이 덕분에 미슐랭은 자전거 타이어 시장을 장악했다.​자전거 시장을 평정한 미슐랭은 1900년에 자동차 타이어 시장에 진출한다. 하지만 판매가 부진했다. 마케팅 차원에서 자동차여행 안내 책자를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주요 여행지를 소개하고 그 사이에 미슐랭 타이어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지점들을 안내하자는 것이었다. 여행 안내 책자에 여행지에서 믿을 수 있는 호텔과 식당도 소개를 했는데 이것이 발전해서 오늘날의 ‘미슐랭 가이드’가 됐다.​세계 최고의 자전거 경주대회인 ‘투르 드 프랑스’도 미슐랭과 관련이 있다. 드레퓌스 사건으로 프랑스가 양분되서 극심한 갈등을 겪을 때 드레퓌스가 유죄라는 주장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한 언론사가 개최한 정치적 이벤트가 투르 드 프랑스였다. ​나중에 드레퓌스가 무죄로 밝혀졌기에 그 언론사의 주장은 분명 잘못된 것이었다. 이렇게 나쁜 동기로 시작된 대회였지만 투드 드 프랑스는 가장 권위있는 경주로 자리 잡았다.세계 최고 권위의 자전거 경주대회인 투르 드 프랑스가 펼쳐지는 모습​​자동차 회사를 시작했으나 투자자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핸리 포드는 1901년 투자자를 찾기 위해서 자동차 경주대회에 출전한다. 이때 포드 자동차에 장착한 타이어는 하비 파이어스톤이라는 타이어 회사 영업사원 출신이 막 시작한 회사의 타이어였다. ​그 자동차 대회에서 포드가 우승하면서 포드와 파이어스톤은 사업 파트너로 승승장구하게 된다.​일본에서 신발 고무밑창을 만들던 이시바시 쇼지로(石橋正二郞·1889~1976)는 일본에도 자동차 산업이 활기를 뛰자 타이어 회사를 만든다. 자신의 성인 ‘이시바시(石橋)’를 영문으로 회사이름을 만드는데 ‘석(石)+교(橋)’면‘스톤(Stone)+브릿지(Bridge)’가 되어야 하는데 이를 뒤집어 브릿지스톤(Bridgestone)이라고 했다. ​당시 세계 최대 타이어회사였던 파이어스톤을 따라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경제가 쾌속 질주하던 1988년 브릿지스톤은 파이어스톤을 인수하게 된다.​브릿지스톤은 골프공으로도 사업 영역을 확장하는데 브릿지스톤 골프용품을 한국에 수입하는 회사의 이름은 창업자의 이름 그대로 ‘석교(石橋)상사’다.​일본 기업이 인수한 글로벌 타이어 회사는 파이어스톤만이 아니다. 최초로 공기압 타이어를 만든 던롭도 일본 기업에 인수됐다.​던롭은 일찍이 1909년 일본 시장에 진출해 일본의 재벌인 스미토모와 제휴해 던롭 재팬을 만든다. 1963년 던롭 재팬은 던롭으로부터 독립을 해서 스미토모고무공업(Smitomo Rubber Industry·SRI)이다. ​역시 일본이 제일 잘나가던 1986년 SRI는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던 영국 던롭을 인수해버렸다. 다른 고무 회사들처럼 SRI도 골프용품 자회사를 만드는데 그것이 바로 ‘스릭슨(SRIxon)’이다. 스포츠용품 기업이 ‘던롭 스릭슨’으로 묶여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런 역사적 과정 때문이다.​미국 매사추세츠주 아쿠쉬네트에서 작은 고무회사를 운영하던 필 영(Phil Young)은 치과의사 친구와 골프 라운드를 나갔다. 그린 위에서 퍼팅을 했는데 공이 생각하는 방향과 다르게 굴러갔다. 영은 자신의 퍼팅 스트로크가 아니라 골프공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친구 병원에 가서 골프볼을 X-ray로 촬영했다. ​그는 치명적인 결함을 발견했다. 코어가 정중앙에 위치해 있지 않고 제각각이었던 것이다. 영은 MIT 동문이자 고무전문가인 프레드 보머를 초빙해 3년간 제품개발에 착수해 1935년 첫 작품을 탄생시켰는데 그 골프공이 바로 ‘타이틀리스트’다. 세계 1위 골프공인 타이틀리스트의 주인이 지난 2012년 휠라코리아로 바뀌게 된다.​​합성고무의 시대에도 흔들리지 않는 천연고무의 위상​2차 세계대전은 고무 위기를 나았다. 우선 가장 중요한 고무 생산지인 동남아시아 지역이 일본과 미국간 태평양전쟁이 벌어지는 전쟁터가 됐기 때문에 고무 공급에 문제가 발생했다. 태평양전쟁 이후 일본이 동남아시아를 장악하면서 천연고무 공급의 90%가 끊겼다.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고무 모으기 운동 포스터​​여기에 전쟁이라는 상황이 고무 수요를 폭발시켰다. 셔먼 전차 한 대에 들어가는 고무만 해도 0.5t이었다. 항공기에는 1.5t이었다. 전함 한 대를 만드는 데 소요되는 개별 부품 중 2만여 개에 고무 75t이 들어갔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데 턱없이 부족했다. 방수, 방풍, 방진, 방음, 신축, 유연의 기능을 두루 갖춘 재료는 고무 외에 다른 대체재가 없었기 때문이다.​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은 2차 세계대전 중 고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고무의 민간 사용을 제한했다. 그리고 합성고무 산업에 국력을 집중했다.​고무비축공사(Rubber Reserve Company)를 설립해 고무의 수입, 생산, 판매 등을 중앙에서 통제하고 경쟁관계에 있던 굿리치(Goodrich), 굿이어(Goodyear), 유에스고무공업(United States Rubber) 등의 회사가 기술정보 협력을 하도록 했다. ​미 정부는 고무공장, 석유화학회사, 대학연구소를 통합해 개발을 지원했는데 하버드대와 매사추세츠공대(MIT)의 톱 브레인도 팀에 포함됐다. 초기 목표는 1941년 231t의 합성고무를 생산하기 시작해 1945년까지 매년 7만t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과 생산기반 시설을 갖추는 것이었다.​고무개발 프로젝트가 본격 가동된 지 8개월 만인 1942년 3월, 개발팀은 1933년 독일의 한 화학자가 개발한 스티렌-부타디엔 혼합방식(SBR)으로 합성고무를 만들 것을 제안했고 정부는 이를 승인했다. 정부 제시 기준을 충족하는 제품이 처음 나온 것은 1942년 4월 파이어스톤(Firestone)의 공장이었고 이후 합성고무가 보편화됐다.​화학산업의 발전으로 합성고무가 보편화됐지만 여전히 천연고무의 위상은 건재하다. 천연고무가 지닌 마모와 진동에 대한 저항성은 여전히 합성고무가 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천연고무의 시장점유율은 지금도 40%가 넘고 오히려 점유율이 오르는 추세다. 의료용 고무제품은 천연고무를 사용해야 의료용 살균기에서 스팀 살균이 가능하고, 유리와 강철의 완벽한 접지를 위해서는 역시 천연고무를 사용해야 한다. ​대형 비행기와 트럭의 타이어는 아직도 100% 천연고무로 만들어진다. 이 밖에 하이테크 산업과 가스·수도·원자력발전 분야에도 고성능 호스, 개스킷, O링 재료로 천연고무가 쓰인다. 천연고무의 위상은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출처] : 김기철 매일경제 기자 : 『김기철의 역사를 바꾼 사물들』 - 7.고무-동물의 창자로 만든 콘돔을 썼다고?…세상에 환희와 평화를 가져다 준 이 물건 / 매일경제, 2023. 7. 28.​​8.『구아노』 - 새똥 때문에 발견한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2차 세계대전의 방향을 바꿨다​“미드웨이 섬의 담수 시설이 고장났음. 빠른 조치 바람.”1942년 하와이 주둔 미국 해군 정보부 암호해독반 지휘관 조지프 로슈포르 중령은 해군 본부에 이 같은 전문을 전송했다..​일본 해군 정보부는 이 전문을 감청하고 해군 본부에 곧바로 타전했다.“AF에 물 부족.”​보고를 받은 해군대장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이제 작전을 감행할 때가 왔군.”​그런데 일본군에게 감청당했다는 보고를 받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의 얼굴에도 미소가 스쳤다. “예식장(미드웨이)에 올 하객(일본군)의 규모도 알아 오도록.”​야마모토는 즉각 미드웨이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다. 진주만 공습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성공시켰던 장본인인 야마모토 대장은 미드웨이가 제2의 진주만이 될 것이라 믿었다.​하지만 착각이었다. 일본 해군은 미군이 던져놓은 미끼를 물었던 것이다. 일본군 통신문에 들어있던 ‘AF’라는 암호가 ‘미드웨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던 미군은 “예식장에 올 하객 수”까지 파악하고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미드웨이 해전은 태평양전쟁의 균형추를 바꿔 결과적으로 역사의 경로를 바꾼 기념비적인 전투다.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한 것은 미국은 어떻게 미 대륙에서 수천km 이상 떨어진, 면적이 5제곱킬로미터 조금 넘는, 사람도 살지 못하는 이 섬을 자기들의 영토로 확보하고 있었느냐는 점이다. 이 모든 것이 새똥에서 시작했다.영화 한 장면​​똥과 오줌을 확보하라​1626년 영국 국왕 찰스1세는 다음과 같은 포고령을 발표했다.“한해 동안 사람과 짐승의 오줌을 모아서 정부에 제출하라.”​국민들은 가정집마다 여름에는 하루에 한 번, 겨울에는 이틀에 한 번씩 오줌을 모은 통을 문 앞에 내놓아야 했다. 그러면 이를 나라에서 수거해 갔다.​하지만 이 포고령을 따르지 않는 농민들이 많았다. 오줌은 농민들에게는 밭에 뿌릴 소중한 비료였기 때문이다. 분뇨 수거율을 높이기 위해 영국 국왕은 분료 수거원들에게 어떤 집이건 들어가서 분뇨를 찾아서 수거해올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기도 했다. 이렇다보니 농민들과 수거원들 사이에서 똥오줌을 숨기고 찾는 숨바꼭질이 벌어졌다.​그렇다면 왜 이런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 것일까? 똥오줌에 들어 있는 질산칼륨 때문이었다.농민들은 경험을 통해 똥오줌이 농작물의 성장을 돕는 비료라는 사실을 수천년 전부터 알아왔다.​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질산칼륨은 화약의 원료이기도 했다. 고려말 최무선이 화약을 개발하는 과정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중국의 화약에는 숯과 황, 초석이 들어가는데 명나라는 초석 제조법을 비밀에 붙였다. ​최무선은 명나라 사신 이원에게서 초석 만드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집에 실험실을 만들고 직접 제조에 나섰다. 최무선이 20여년의 연구 끝에 얻어낸 방법은 나뭇재에 사람의 변을 섞어서 오래 보관한 뒤 여기서 추출하는 방법이었다. 변에 있는 요소와 암모니아로부터 생긴 질산과 나뭇재 속의 칼륨이 결합하여 초석(질산칼륨)이 되는 원리였다.최무선의 화약 제조과정을 그린 최대섭 화가의 그림.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작품.​​쇠를 무기로도 만들 수 있고 보습으로도 만들 수 있듯이 똥오줌도 농작물을 키우는 거름으로도 쓰이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화약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중국에서 화약 제조법을 배워가서 이를 발전시킨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은 17세기에 대포와 총포용 장약을 생산했는데 장약은 탄소 10%, 유황 15%, 초석 75%로 구성돼 있다. 17세기는 유럽의 절대왕정들이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던 시기여서 초석 수요가 많았다. ​그렇다 보니 영국은 포고령까지 발표하고 오줌 수거꾼인 초석장이까지 고용해서 초석 확보에 혈안이 됐던 것이다. 말하자면 당시 오줌은 국가의 전략 물자였던 셈이다.​영국이 18세기 중엽 인도의 여러 지역 중에서 벵골 지역을 가장 먼저 정복해서 합병한 배경에는 이 지역에 묻혀 있던 초석의 가치도 크게 작용했다.​1700~1740년대 사이 영국은 벵골지역에서 연간 1000~2000톤의 초석을 수입했다. 1757년 플라시 전투의 승리로 영국 동인도회사는 벵골지역을 손아귀에 넣게 된다. 이로써 영국은 전세계 초석 생산량의 70%를 확보했다. 영국이 제국주의 식민지 쟁탈전에서 앞설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다.​​구아노가 가져다준 축복​18세기말 세계의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과 신대륙에서 들어온 새로운 구황작물의 힘이 컸다. 하지만 인류는 증가한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더 많은 농업생산력이 필요했다. 지력을 키워 생산력을 높여주는 비료가 필요했다.​19세기초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토양 영양제는 도살장에서 뼈를 갈아만든 가축의 골분이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에서는 뼈를 제분소로 보내 가루로 만든 뒤 이를 밭에 뿌렸다. 하지만 골분의 공급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 ​골분 가격이 폭등하자 중간상인들이 해서는 안될 일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워털루나 아우스테클리츠 같이 전쟁이 벌어졌던 지역에서 사람의 뼈를 수거해서 이걸 골분으로 만들어 판 것이다. ;지는 1822년 이렇게 보도했다.​“공공연하게 대규모로 자행되던 행위가 이제는 의심의 여지없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어졌다. 죽은 병사들이 상업 거래의 가장 중요한 품목으로 전락했다는 것 말이다. 무덤 도굴꾼들이 전쟁터에서만 한정적으로 도굴을 할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다. 언급하기 매우 조심스럽지만, 크게 본다면 요크셔의 성실한 농부들이 매일 먹는 일용할 양식을 자기 아이들의 뼈에 빚지고 있다.”​사람의 뼈가 섞였을지 모를 골분을 농민들이 경작지에 뿌리는 비극을 끝낸 물건이 있다. 바로 ‘구아노(guano)’다. 구아노는 새똥들이 쌓여 바위처럼 굳은 물질을 말한다.페루 바예스타스 섬이 건조, 퇴적된 조류 분변 구아노로 새하얗게 뒤덮여 있다​​로맹 가리의 소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는 인생의 허무를 그리고 있지만, 페루로 날아온 새들이 싼 똥은 페루에게 축복이 됐다. 새똥이 쌓인 섬들은 아무것도 자라지않는 불모의 땅이 됐지만 그 새똥이 농작물을 키우는 훌륭한 비료가 되는 역설은 또 로맹 가리의 소설을 닮기도 했다.​독일의 지리학자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알렉산더 폰 훔볼트(1769~1859)눈 1802년 페루 연안 지역을 탐사 중이었다. 페루 연안에서 21km, 리마에서 남쪽방향으로 805km 정도 떨어진 친차 제도로 알려진 섬들 주변으로 다가가고 있었는데 섬에서 나오는 악취로 접근조차 힘들었다. ​무덤 봉분 모양의 섬들에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았지만 섬들 주위로는 수 많은 새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갈매기, 가마우지, 펠리칸 같은 새들이었다.​페루가 새들의 군락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페루 연안에서 북상하는 해류의 영향이 컸다. 이 해류가 바닷속을 한번 뒤짚어 놓기 때문에 심해에 있던 플랑크톤이 올라와 해수면에는 플랑크톤이 넘쳐나게 된다. ​플랑크톤이 넘쳐나니 엔초비타라고 하는 멸치떼가 나타나고 또 이들을 노리는 새떼들이 모여든 것이다. 플랑크톤과 물고기떼와 새떼들을 불러모으는 이 해류에는 ‘훔볼트해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페루 연안에서 물고기 잔치를 벌인 새떼들은 그 주변 섬들을 화장실로 이용했다. 수만년 동안 새들의 똥이 쌓이면서 구차 제도에는 구아노층이 형성됐다. 퇴적층의 두께만 무려 45미터였다.​이 구아노가 최고의 비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훔볼트는 구아노 샘플을 채취해 유럽으로 가져와 프랑스 화학자들에게 성분 분석을 의뢰했다. 분석결과, 질소 함유량이 17%에이른다는 사실이 확인됐고, 유럽의 과학자들은 구아노의 배구 고화질 노트북 오늘 잠재력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선구적인 화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가 있었다.​리비히는 ;(1840)에서 “모래와 점토로만 이뤄진 토양조차 구아노 소량만 있으면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있다”고 구아노의 효능을 선전했다.​유럽에 구아노 열풍이 불었다. 1841년 영국은 친차 제도에서 1880톤의 구아노를 들여왔는데 4년 후인 1845년에는 수입량이 21만9704톤으로 증가했다.​구아노를 사실상 독점하고 있던 페루는 40년간 1300만톤의 구아노를 수출해 대략 1억5000만파운드를 벌여들였다. 오늘날 화폐가치로 치면 대략 130억달러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구아노덕분에 페루는 엄청난 경제호황을 누렸지만 안타깝게도 친차 제도의 구아노는 1876년쯤 모두 고갈되고 말았다.1860년대 페루남서쪽 해안 친차(Chincha)섬의 구아노를 채취하는 모습​19세기 중반 페루의 구아노 광산. 바닷새의 배설물이 축적되어 화석화한 ‘구아노’는 ‘초석’과 더불어 대단히 좋은 비료이자 화약의 원료로 남미 태평양 연안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내륙국가인 볼리비아에 해군이 있는 이유​남미의 볼리비아는 육지로 둘러싸인 내륙국이다. 바다가 없는 이 나라에 해군은 존재한다. 볼리비아 해군은 대양을 향해 출항할 날만을 손꼽아 기대린 채 해발 3800m에 위치한 티티카카호(湖)에 정박 중이다.​바다는 없지만 볼리비아는 매년 3월 23일에는 바다의 날 기념식도 거행한다. 볼리비아 최대 도시 라파스에서는 흰 제복 차림의 해군이 거리를 행진하고, 배 모형과 깃발을 든 아이들이 그 뒤를 따른다. 과거 볼리비아가 가졌던 바다를 기억하고 다시 찾아오자는 다짐을 하는 것이다.​그렇다면 볼리비아는 왜 바다를 잃어버린 것일까? 이것 역시 새똥 때문이다.친차제도의 구아노가 고갈돼 가고 있을 때 남미의 아타카마 사막에서 초석과 함께 대량의 구아노 집적지가 발견됐다.​지금 아타카마 사막은 칠레 영토 안에 있지만 당시만 해도 칠레와 페루, 볼리비아가 아타카마 사막을 국경으로 삼고 있었다. 당연히 세 나라 모두 구아노에 욕심을 냈다.​우선은 칠레와 볼리비아가 협상을 통한 해결책을 찾았다. 1866년 칠레와 볼리비아는 경계선 조약을 맺는다. 칠레와 볼리비아의 국경을 남위 24도선으로 하고 23도와 25도선 사이에서 나는 구아노와 초석 생산량의 반을 나누기로 했다. 그런데 땅을 파면 팔수록 볼리비아 영토 쪽에 대부분의 구아노가 매장돼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1876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볼리비아 군사정부는 결국 칠레와의 협약을 파기하고 볼리비아 영토 안에서 구아노를 채굴하는 칠레 기업들에 대한 수출 관세를 대폭 인상했다. 칠레가 이를 거부하자 볼리비아는 한걸음 더 나아가 칠레 기업이 개발한 광산을 몰수해버렸다. ​결국 1879년 칠레는 볼리비아에 대해 군사적 보복에 나서고 여기에 주변국가들이 가세하면서 확전됐다. 이것이 태평양전쟁, 일명 새똥 전쟁이다.​아타카타 사막의 구아노 접근권을 봉쇄당했던 페루는 볼리비아와 동맹을 맺고 참전했지만 영국과 프랑스가 지원하던 칠레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티티카카 호수를 순찰 중인 볼리비아 해군.​​전쟁은 1883년 칠레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 패배의 결과로 볼리비아는 바다를 잃었다. 태평양 연안의 안토파가스타 지역을 칠레에 내준 것이다. 총 면적 12만㎢, 해안선 400㎞에 달하는 땅이었다. 태평양 접근권을 잃은 볼리비아는 졸지에 내륙국이 되고 말았다.​볼리비아는 여전히 바다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2006년 취임한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은 ‘해양 진출권 확보’를 최우선 외교 정책으로 제시했다. 그는 볼리비아 영토 주권을 되찾겠다며 “1904년 평화조약을 폐기하거나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칠레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2011년 세바스티안 피녜라 칠레 대통령은 해당 조약의 합법성을 재천명했다.​모랄레스 대통령은 2014년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이 사안을 회부했지만 ICJ는 평화조약의 효력을 인정하고 칠레에 재협상 의무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페루와 칠레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던 볼리비아 태평양 연안 영토과 칠레 땅이 되면서 남미의 앙숙 국가인 두 나라는 국경을 마주하게 됐고 필연적으로 영토 분쟁을 벌이게 됐다. ​페루 남부의 타크나 지역은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칠레가 차지하게 됐으나 1929년 리마조약을 통해 다시 페루에 반환됐다. 하지만 여전히 콩코르디아라고 불리는 지역은 양국이 아직도 자기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그렇다면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칠레에는 행복한 결론이 기다리고 있었을까? 역시 아니었다. 전쟁을 통해서 구아노와 초석이 묻힌 지대를 칠레가 대부분 확보했지만 광산의 실제 소유권은 대부분 영국인들에게 돌아갔다. ​칠레가 볼리비아와 페루를 상대로 전쟁을 하는 사이에 영국이 광산의 채권을 10분의 1로 떨어진 가격에 사들였기 때문이다.​​구아노 있는 섬을 미국땅으로 만든 황당한 미국의 법​페루산 구아노 수송을 영국 운송업체가 독점하면서 미국은 여기서 소외됐다. 영국의 조치에 분노한 미국 의회는 1856년 ‘구아노 섬 법안(Guano Islands Act)’를 통과시키며 자체적인 구아노 확보에 나섰다. 미국인이 어떤 섬에서 구아노를 발견하면 그 섬의 점령을 인정한다는 말도 안되는 법안이었다.​황당한 법안이었지만 1856년~1903년에 미국의 사업가들은 94개의 섬과 암초, 산호섬 등을 점령하고 소유권을 주장했다. 미국 정부는 이중 66개 섬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했다.​구아노 섬 법안으로 확보한 뒤 미국이 현재 미국령 군소 제도(United States Minor Outlying Islands)로 분류해 실효지배하고 있는 섬은 모두 9곳이다. 여기에는 베이커섬(Baker Island), 하울랜드섬(Howland Island), 자르비스섬(Jarvis Island), 존스턴 환초(Johnston Atoll), 킹먼 환초(Kingman Atoll), 미드웨이 환초(Midway Atoll), 나배사섬(Navassa Island), 팔미라 환초(Palmyra Atoll), 웨이크섬(Wake Island)이 포함돼 있다. 이중 나배사섬을 제외한 8곳이 모두 태평양에 위치해 있다.​미국이 구아노섬 법안을 제정할 당시에는 구아노 확보가 가장 우선하는 과제였지만 이후 이 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는 구아노 확보 보다는 미국의 전략적인 목적이 더 크게 작용한 측면이 있다.​특히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사람이 링컨 대통령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윌리엄 H. 시워드였다. 시워드 국무장관은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획득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1867년 시워드는 주미 러시아 공사 예두아르트 스테클 남작과 협상을 통해 알래스카를 720만달러에 매입했다. 당시 미국 정가에서는 ‘알래스카’를 ‘시워드의 아이스박스’라고 부르며 놀림감으로 삼았지만 새 영토는 훗날 금, 원류, 가스가 발견되면서 미국의 복덩어리가 됐다.​하지만 당시 시워드가 알래스카를 매입한 것은 이런 가능성을 내다본 결정이 아니라 태평양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는 기지로 삼기 위해서였다.​구아노섬 법안에 근거해서 1867년 8월 28일 미국이 미드웨이 환초를 확보할 때도 이런 전략적인 판단이 더 중요하게 작용했다. 1867년 전투함 래커워너호의 윌리엄 레이놀즈 함장이 미드웨이 환초를 점령하며 소유권을 취득하는데 당시 미 해군은 미드웨이 환초를 하와이에서 아시아쪽으로 향하는 징검다리 항구로 삼으려고 했다. ​물론 실망스럽게도 미드웨이가 심해 항구로는 부적합한 것으로 드러났지만, 미드웨이 환초는 훗날 공군력의 중요한 요소가 되면서 앞서 얘기한 것처럼 2차 세계대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미국이 19세기말 태평양 지역에서 섬 확보에 나선 배경에는 독일의 적극적은 영토 확장 움직임도 작용했다.1884년 독일령 뉴기니를 점유하면서 태평양에서 영토 획들을 시작한 독일 해군은 오늘날 마셜, 솔로몬, 마리아나 제도까지 포함하여 남태평양 섬들을 빠르게 식민화했다.​태평양에서 징검다리를 확보하고자 했던 미국과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미국과 독일은 사모아섬에서 충돌했다.​1872년 전함 내러갠싯호(Narragansett)의 리처드 미드(Richard W. Meade) 사령관은 ‘미국의 위대한 정부의 우정과 보호’를 대가로 동사모아인들로부터 파고파고(Pago Pago) 항구의 땅을 임대해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1885년 독일 해군은 서사모아는 물론 동사모아까지 빼앗겠다는 의지를 발표했고 이는 곧바로 미국 영사로 하여금 사모아가 미국의 보호 아래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반대 입장을 발표하도록 만들었다.​미국의 강경한 입장에 놀란 독일의 비스마르크는 협상가들에게 물러나라고 지시한 뒤 1890년 베를린 협상에서 독립된 사모아를 독일 미국 영국 삼국이 감독하기로 합의한다. 이후 서사모아는 독일령이 됐다가 1차 세계대전 이후 뉴질랜드의 보호령이 됐다. 하지만 동사모아는 ‘아메리칸 사모아’로 남게 됐다.​알래스카부터 미드웨이, 하와이, 사모아로 이어지는 태평양의 미국 징검다리들을 지켰고 이 징검다리는 일본과의 태평양전쟁에서 그 위력을 발휘했다.​미드웨이 환초의 교훈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미국은 섬들에 군사 기지를 유지하며 이를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으로 활용하고 있다.​미국의 해군 제독이자 전략가 앨프리드 세이어 머핸(영어: Alfred Thayer Mahan,1840~1914년)은 ;이라는 책에서 “미국의 안보는 해군력과 섬 기지의 결합을 통해 태평양을 지배하는데 달려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런 생각은 여전히 미국의 세계 전략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구아노를 똥값으로 만든 하버-보슈 공정하버-보슈 공정을 개발한 카를 보슈(왼쪽)와 프리츠 하버​​구아노를 통해서 식물에 공급해주는 것은 결국은 질소다. 질소는 공기 중에 78%를 차지하는 가장 흔한 원소다. 대기 중의 질소를 고정해서 비료를 만들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대기 중의 질소가 삼중결합으로 단단히 묶여 있다는 사실이다.​인류는 명확한 원리는 이해못했지만 경험을 통해서 질소가 고정되는 몇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우선 번개가 치면 순간적인 높은 에너지 때문에 질소 분자의 3중 결합이 깨지면서 질소 산화물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일본어로 번개를 이나즈마(稻妻•いなずま)라고 부른다. ‘벼 도(稻)’에 ‘아내 처(妻)’를 붙여 ‘벼의 아내’라는 뜻이다. 일본의 농민들은 경험을 통해 번개가 치면 벼가 잘 자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과학적으로는 번개가 치면 공기 중의 질소가 비에 녹아들어 그 비가 땅을 비옥하게 하고 그 덕분에 벼가 여문다.​질소가 고정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콩과 식물 등의 뿌리에 의한 것이다. 뿌리에 존재하는 뿌리혹박테리아가 질소 분자를 고정시킨다. 과거 농부들은 밀이나 벼 같은 작물을 콩과 식물과 번갈아 가면서 심었는데 역시 과학적으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콩과 식물이 땅의 지력을 높힌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서 알았기 때문이다.​많은 과학자들이 질소를 고정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려는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 중 한명이 독일의 화학자 프리츠 하버였다. 당시 독일의 화학자들은 수소(H2)와 질소(N2)를 결합해 암모니아(NH3)를 얻는 방법을 연구했다. ​암모니아를 얻으면 합성비료의 원료로 즉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화학반응식으로는 간단하지만 발열반응이라는 현상 때문에 실제로 암모니아를 얻기는 쉽지 않았다.​하버는 이 문제를 오스뮴을 촉매로 사용해서 해결하고자 했다. 당시 하버는 세계적인 화학기업인 바스프(BASF)의 연구비 지원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하버가 세운 이론상으로는 높은 압력과 오스뮴을 촉매로 사용하면 암모니아 생산 수급율을 높일 수 있었다.​하지만 이를 경제성 있는 대량 생산 체제로 전환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다행히 바스프에는 카를 보슈라는 천재적인 공학자가 있었다. 보슈는 하버의 이론을 생산 시스템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1920년대에 하버공정으로 암모니아를 생산하는데 사용됐던 고압 강철 반응기. 독일 칼스루헤 공대에 전시돼 있다. ​​그는 1913년 높은 압력을 유지하며 생산 효율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암모니아 공장설비를 완성했다. 이 공정이 바로 ‘하버-보슈 공정’이다.​하버-보슈 공정으로 합성비료를 대량생산할 수 있는 길이 열리면서 ‘새똥 전쟁’까지 유발시켰던 구아노가 말 그대로 똥값이 됐다. 합성비료로 인해 식량생산이 늘어나고 인류가 겪는 기아가 줄어들게 한 공로로 하버와 보슈는 각각 1918년과 1931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하버의 노벨상 수상을 두고서는 일부에서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버가 1차 세계대전 때 했던 일 때문이다. 유대인이지만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애국심이 훨씬 강했던 하버는 독일이 벌인 전쟁에 도움을 주기 위해 독가스 무기를 개발했기 때문이다. ​독가스 개발에 하버는 군인들보다 더 적극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염소를 이용해서 하버가 개발한 독가스는 1915년 4월 22일 벨기에의 이프르 전선에서 프랑스 군대를 상대로 실전에 사용됐다. 이 독가스로 프랑스 병사 5000명이 질식사했다.​하버의 이 같은 행동을 가장 반대한 사람은 그의 아내 클라라 임머바르였다. 독일 최초의 여성 화학박사이기도 했던 임머바르는 화학 무기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임머바르는 하버의 독가스 사용으로 승리한 이프르 전선 축하연이 열렸던 1915년 5월 자신의 집에서 하버의 권총으로 자살했다. 아내의 자살에도 불구하고 하버는 이튿날 러시아 전선으로 떠났다고 전해진다.​‘똥’이 농작물을 키우는 비료가 될 수도 있고, 또 사람을 죽이는 화약이 될 수도 있는 것처럼 과학이 인류를 구원하는 길을 열 수도 있고, 또 파멸로 이르는 문을 열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하버는 자신의 인생을 통해 보여줬다.​[출처] : 김기철 매일경제 기자 : 『김기철의 역사를 바꾼 사물들』 - 8.구아노 - 새똥 때문에 발견한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2차 세계대전의 방향을 바꿨다 / 매일경제, 2023. 8. 4.​​​9. ‘관찰’과 ‘실험’을 가능하게 해준 『유리』 - 갈릴레이도, 뉴턴도…유리가 없었으면 ‘과학혁명’은 없었다 ​1609년 7월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베네치아에 들렀다가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을 들었다. 네덜란드의 안경 제작자인 한스 리퍼세이라는 사람이 렌즈를 두 개 배치해서 ‘망원경’​이라는 물건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갈릴레이는 그 물건의 중요성을 단박에 알아 차렸다. 아, 모두가 예상하는 것처럼 ‘망원경’​을 이용해서 천체를 관측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갈릴레이는 멀리 있는 물체를 볼 수 있는 도구라면 군사와 무역에서 매우 중요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망원경을 이용해서 베네치아 항구로 들어오고 있는 배가 어떤 배인지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낼 수 있다면 큰 돈을 벌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요즘으로 치면 투자 정보를 먼저 알게 되는 셈이다.​8월초에 갈릴레이는 네덜란드에서 온 사람이 새로 발명된 망원경을 갖고 파도바에 도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서둘러 베네치아에서 파도바로 돌아왔으나 길이 엇갈리고 말았다. 그 사람은 갈릴레이와 반대로 베네치아로 향했다.오른 손에 망원경을 쥐고 있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모습​​갈릴레이는 그 사람을 따라가는 대신 네덜란드산 렌즈를 사서 직접 망원경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오목렌즈와 볼록렌즈를 교차해서 망원경을 만들었다. 그날이 1609년 8월 4일이었다.​갈릴레이는 자기가 개발한 망원경을 베네치아 총독 앞에서 시범을 보인 뒤 선물로 상납했다. 그 덕분에 갈릴레이는 파도바대학교 종신 교수직을 얻었다.​망원경에 대한 연구를 지속한 갈릴레이는 1609년 12월 20배율의 망원경을 완성했고, 1610년초 그 망원경으로 목성에서 가장 밝고 가장 큰 위성 네 개를 발견했다. 이 발견으로 ‘지구중심설’은 무너진다. 이 위성을 우리는 지금도 ‘갈릴레이 위성(Galilean moons)’이라고 부른다.​과학의 근본은 ‘관찰’과 ‘실험’이다. 엄정한 ‘관찰’과 ‘실험’을 통해 논증된 사실에 기반한 진리가 바로 과학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리’는 인류의 과학을 발전시킨 일등공신이다. 유리가 없었으면 ‘관찰’과 ‘실험’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인간이 볼 수 있는 가시거리 밖의 사물까지 관찰할 수 있게 해준 망원경으로 인해 천체물리학을 시작으로 근대 과학이 중세의 몽매에서 깨어날 수 있었고, 인간이 들여다볼 수 없는 세포까지 관찰할 수 있게 해준 현미경 덕분에 생명과학이 움틀 수 있었다. 유리에 굴절된 스펙트럼으로 빛을 분석했고, 전자와 광자와 양자의 세계 속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그뿐인가? 우리가 생각하는 과학 실험실은 온통 유리로 가득 차 있다. 유리로 된 비이커, 실린더, 플라스크, 시험관을 갖추지 않은 실험실은 존재할 수가 없다.인류의 과학 문명이 얼마나 많은 빚을 유리에 지고 있는지, 떠나보자.​​우연과 행운이 빚은 유리의 탄생​많은 혁신들이 노력과 우연, 행운의 결합이듯이 유리 배구 고화질 노트북 오늘 역시 그렇게 발견됐다. 로마의 역사학자 플리니가 쓴 ‘박물지(Nature History)’에 따르면 유리는 기원전 3000년경 페니키아에서 처음 만들어졌다.​천연소다를 거래하던 페니키아 상인이 강가 모래톱에서 솥을 걸어놓고 식사 준비하던 중에 천연소다 덩어리가 불에 녹아 모래와 뒤섞이는 일이 벌어졌다. 뜨거운 소다와 모래가 섞이니 투명한 액체 상태의 물질로 변했고 이것이 굳어서 튜명한 유리가 됐다. 모래를 이루는 이산화규소(SiO2)와 천연소다 속 나트륨이 화학반응을 일으켜 유리가 된 것이다.​페니키아의 제조법이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 전해져 소다석회 유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이 제조 기술이 세계 각지로 전파됐다.​로마제국 전성기인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 로마가 유리 산업의 중심지가 되는데 다양한 모양과 색깔의 유리 성형 기술이 발전했다. 특히 입으로 불러 원하는 모양을 만드는 블로잉 기법이 크게 발전했다.​우리나라에도 삼국시대에 본격적인 유리 문화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2000년 초 전북 익산 왕궁리와 미륵사지터에서 발견된 초록색과 보라색의 유리 구슬과 유리를 녹였던 도가니 등을 보면 7세기 무렵 우리도 독자적인 유리 제조 기술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영어 ‘글래스(glass)’의 어원은 투명하고 빛나는 물질을 지칭하는 라틴어 ‘글래숨(glaesum)’이고 우리가 쓰는 유리(琉璃)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인 ‘바이두랴(Vaidurya)’에서 나왔다. 바이두랴가 라틴어 ‘비트룸(Vitrum)’을 거쳐 한자 벽유리(壁琉璃)로 음역됐고 여기서 유리가 나온 것이다.​유리는 너무 귀한 물건이어서 보물이나 장신구로 주로 사용되었고 성당이나 모스크 같은 종교적 건물의 스테인드글라스로 쓰였다. 색유리를 통해 쏟아지는 다양한 색깔의 햇빛보다 신의 은총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다.​유리의 뒷면을 주석 같은 금속으로 막으면 빛이 반사돼 거울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12세기 이후 유리 거울도 널리 사용됐다. 하지만 유리를 넓고 편편하게 만드는 기술이 발달되지 않아 크기에는 한계가 있었다.베르사이유 궁전의 ‘거울의 방(Hall of mirrors)​​1670년대 프랑스에서 유리를 녹여 금속 테이블에 붓고 롤러로 펴서 냉각시키는 기술을 개발하면서 대형 유리와 대형 거울을 생산할 수 있게 됐다. 프랑스의 이 기술이 집대성된 곳이 베르사이유 궁전의 ‘거울의 방(Hall of mirrors)’이다. 루이14세 즉위 17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울의 방은 578개 거울로 장식된 17개면의 거울 벽면과 17개의 유리창으로 구성돼 있다.1248년 완공된 파리의 생 샤펠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철과 유리로 지어진 수정궁 내부. 수정궁은 1851년 런던에서 열린 제1회 만국박람회를 위해 지어졌다. 철과 유리로 지어진 수정궁 내부. ​​유리를 넓고 편편하기 만들 수 있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유리는 건축 소재로도 널리 활용되기 시작했다. 1851년 영국은 만국박람회의 전시장으로 쓰일 건물을 세상에 선보이는데 건축가 조지프 팩스턴 경이 하이드파크 내에 철골과 유리로 길이 563m 폭 124m, 축구장 18개 크기의 거대한 온실 같은 건축물을 1년 만에 완성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것이 크리스탈 팰리스, 바로 수정궁이다. 그 이후 철골과 유리는 도시 건축의 핵심적인 소재가 됐다.​​유리 덕분에 ‘관찰’과 ‘실험’이 가능했다자카리아스 얀센(1580~1638)와 그가 만든 최초의 복합 현미경​​광학이 가장 발전했던 네덜란드에서 망원경이 처음 개발된 것처럼 현미경 역시 네덜란드에서 처음 만들었다. 1590년경 네덜란드의 안경제작자인 자카리아스 얀센은 18인치의 황동관에 볼록렌즈와 오목렌즈를 조합하여 최대 10배율의 현미경을 만들었다.로버드 훅과 그가 사용한 현미경로버트 훅의 저서 『마이크로그라피아(Micrograph1a)』 와 훅이 현미경으로 관찰한 코르크의 단면​​영국 그레셤칼리지의 기하학 교수이자 물리학자였던 로버트 훅(Rovert Hooke)은 1660년대 현미경을 직접 만들어 이를 관찰에 활용한다. 그가 1665년에 출간한 ;가 바로 현미경으로 관찰한 바를 기록한 책이다. ​그는 현미경으로 코르크의 세포 구조를 처음 발견했는데 세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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